함안의 추억 (군민참여기록) ( 3 )

Description

함안의 추억
이민부(대한지리학회장, 한국교원대학교)


(서문)

지리학은 인간 생활의 공간법칙을 연구한다. 그 근본은 지역에 대한 설명에 있다. 지역에 대한 설명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의 규명에서 출발한다. 지리학은 지역지리(지역에 대한 기술과 설명)와 환경지리(인간과 환경과의 관계, 인간의 적응, 인간의 환경변화, 또한 그 영향)와 이론지리(인간 공간의 규칙과 이론)로 대별 되고 더 나가면 응용지리(지리학의 사회적 기여, 지리적 계획과 설계)가 존재할 수가 있다. 먼저 지역에 대한 기본적인 기술과 설명이 요구된다. 여기서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더하면서, 지리 이론을 기대한다. 더 나아가 쾌적한 삶의 공간을 만들기를 희망한다. 그 무엇도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자연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던 작은 고장에서의 유소년기의 생활과 그 추억은 대도시에서 생활하고 도시의 영향권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참으로 소중하게 남아 있다. 대학 교정의 주변에서 함안의 지리적 기억을 자주 되살린다.


(본문)

필자는 6.25가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더운 여름날 경남 양산 동면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입학하기 1년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경남 함안에서 자라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양산에서 창원, 마산으로 전근을 하신 부친을 따라 다시 마산에서 먼저 함안군 칠원면으로 이사를 갔다. 함안의 동쪽에 있는 면으로 칠원, 칠북, 칠서면을 합하여 삼칠면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한 때 칠원은 상당히 큰 고을이었던 적도 있었다. 칠원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다니다가 2학기에 다시 가야면으로 이사하고 가야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함안군 칠원면으로 이사하기 전 마산에서 살았던 기와집과 콘크리트 마당과 우물과 소란했던 바깥의 기억(3.15 부정선거 사태와 4.19 사태)도 있다. 당시 큰 아버지 집은 큰 냉면집을 하고 있었던 기억이 나고, 자전거에 치여서 병원에서 얼굴에 몇 바늘 꿔몄다. 학교 가기 전이었다.

아직도 칠원에 대한 기억도 있다. 넓은 하천(광노천으로 당시에는 하천의 이름을 모르고 다녔을 것이다)의 자갈밭과 모래밭, 그리고 하천 너머의 작은 야산들과 밀밭이 기억이 난다. 칠원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학교 사정이 열악하여 교실에는 책걸상이 없어서 학교가면 엎드려서 공부를 했다. 칠원으로 이사가서 학교 가기 전 1년은 그냥 잘 놀았다. 한글을 미리 깨친다는 일도 없었다. 시골에서 잘 놀았다. 물론 초등학교 저학년 때도 자연속으로 돌아다니며 놀았던 것 같다. 가야초등학교에서는 4학년까지 2부제 수업을 했다.

어린 시절 생활의 거의 모두는 가야에서 이루어졌다. 함안의 추억보다는 가야의 추억이 맞는지도 모른다. 대도시의 상점들 이름에 가야가 보이면 반갑다. 그러나 가야는 함안의 가야가 아닌 가야도 매우 많다. 가야 지명은 부산, 창원, 창녕, 고령, 고성에서도 사용된다. 가야시대의 가야뿐만이 아니라 충남의 가야산도 있다. 가끔 드물게 아라라는 이름과 아라가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아마도 함안일 것이다. 한복집과 한식집에 참 잘 어울리는 이름으로 보인다. 중학교 입학할 때 부산에도 가야초등학교가 있는 것을 알고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가야라는 이름과 아라라는 이름은 모두 예쁘고 정겹게 느껴진다.

중학부터는 부산으로 유학을 다녔고, 중2때까지는 부산 영도의 먼 친척집에서 하숙을 했다. 아마 쌀로서 하숙비를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농사를 짓지 않았지만 그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이름은 가야초등학교이다. 함안이 과거 가야시대 번성했던 아라가야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4학년되면서 함안의 남쪽에 살던 동급생들이 분리되어서 새로 만들어진 아라초등학교로 갔다. 작년 근 40년이 넘어서 서울에서 동기생들을 만났는데, 물론 저학년 때는 같이 다녔으므로 가야초교와 아라초교 출신들이 함께 만났다. 그 날 알았던 것은 동기생들은 같은 교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1 때 부산에서의 충격은 많았다. 갑자기 한국 제2의 항구도시로 유학을 갔으니, 그 많은 사람과 높은 빌딩과 먼가 다른 도시화된 동급생들. 67년 마지막으로 영도 다리가 들어 올려질 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했을 때 그 어마어마한 인파들이었다. 세월이 더 지나 아마 2학년이 더 지나 부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함안-마산-부산-서울(다시 부산과 함안) 등으로 거친 친구들은 변화의 충격이 훨씬 덜했을 것이다.

중학교 때 방학이 되어 부산에서 함안의 집으로 갈 때는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가서 마산서 다시 함안 가는 버스를 타고 갔다. 어린 시절이었으므로 그리 힘든 줄은 몰랐다. 교통의 격세지감이 심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부산 서구 충무동에서 부산의 주례, 가야, 구포, 김해, 진영으로 해서 마산으로 들어갔다. 신흥여객과 천일여객의 직행은 몇 번 쉬고 바로 부산과 마산을 연결하였다. 부산 충무동은 통학할 때 영도에서 탄 버스가 내리는 곳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함안은 여전히 기억으로 추억으로 많이 남아 있다. 지금은 엄청나게 변화하였지만 필자는 당시 지낸 고향 지역에 대한 기억으로 지리를 돌이켜보고자 한다. 기억의 지리(geography of remembering)에 따라 지리의 변화(change of geography)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억으로 지리 하기(doing geography using remembrance)를 시도한다. 초등학교를 1961년에 입학했다. 당시에 보리 고개가 있었다. 매우 가난하던 시절 대부분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생활들이었다. 미국의 구호물자로서 강냉이(옥수수)가 배급되었고, 학교에서 점심을 못가지고 오는 학생들에게 강냉이 죽 혹은 강냉이 찐빵을 만들어 주었다. 개교기념일 등 학교 축제 비슷한 행사가 열리는 날이면 모든 학생에게 강냉이 빵을 나누어주었다. 모두에게 즐거운 축제였다.

당시 가야는 가야면으로 함안군의 군청소재지이다. 지금은 가야읍으로 역시 군청소재지이다. 지리시간에 배운 내용으로서 과거 조선시대의 함안의 중심지는 함안군 함안면이었지만, 일재시대 철도가 가야면을 지나면서 가야면이 발전을 하게 되고 육이오 후에는 군청과 경찰서 등 주요 군 단위 관공서가 가야로 옮겨 왔던 것이다. 함안면 사람들은 스스로 함안읍이고 부르고 읍에 간다하면 함안읍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하게는 가야면이나 함안면이나 읍이 아니고 면이었다. 함안면은 함안에서 가장 높은 남쪽의 여항산쪽으로 들어가 있어 고도가 약간 높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중심지답게 함안의 향교가 위치한다. 조선시대에 가야면은 함안면에 비하여 저습지가 많아서 사람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항산은 함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함안과 남해안에 접한 창원 진동을 경계 짓고 있으며 지역사람들이 각태미산으로도 부른다. 그것은 이 산에서 6.25 때 많은 미군들이 전사하면서 미군들이 갓뎀이라고 표현하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이 산에는 호랑이와 늑대 등이 살고 있다고 들어 왔다. 지금에 비해서는 너무 심산유곡이었다.

가야시대의 함안, 아라가야는 상당히 강성했다고 한다. 특히 신라에 비교적 늦게 통합되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저항이 센 편이었고, 신라의 응징도 만만치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군사적으로 낙동강과 남강을 넘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는 하천 퇴적물도 적어서, 예를 들어서 낙동강 삼각주도 규모가 작았을 것으로 보는데, 하운을 통해 남강-낙동강-남해안으로 통하여 전라도의 마한과 일본과도 통행을 했다고 한다. 가야의 철기문화의 발달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가야의 고분이 잘 보존되고 있지만, 아트막한 작은 구릉지 산에 위치한 커다란 봉분을 가진 고분은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보름이 되면 쥐불놀이를 하던 곳이 고분 위였다. 기억하기를 ‘달집에 불이야 기와집에 불이야..’하고 외쳤다. 당시 그 어려운 시절의 문화재 관리 체계였다. 물론 당시의 모든 고분은 도굴을 당했을 것이었다.

함안의 북쪽은 남강을 경계로 의령군과 접하고 있다. 말하자면 함안군 군북면, 법수면, 가야면, 칠서면은 남강의 범람원이 들어차 있고, 칠북면은 낙동강에 접하고 있으며 건너편의 창녕군과 접하고 있다. 이러한 범람원은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일본의 미곡 증산 정책으로 농경지로 개간이 된다. 아라가야의 상징인 말산리와 도항리 고분은 낮은 구릉지 위에 위치하여 홍수의 범람은 전혀 없다. 사실 가야면은 남강의 지류인 함안천을 끼고 있고, 칠원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광노천을 끼고 발달하고 있다. 함안군 남쪽의 함안면과 여항면은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 지역에 위치한다.

함안은 동쪽으로 창원시, 남쪽으로는 마산시, 서쪽으로 진주시(진양군)과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남강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의령과 창녕과 접하고 있다. 함안은 남강으로 의령과 나누어 있었지만, 군세가 적어서 그런지 의령과 합하여 국회의원 선구거가 되었다. 함안은 그 자체가 함안의 특징을 지니지만, 함안내의 여러 면들은 또다시 면의 지역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범람원이 많았던 법수와 대산면과 산지의 여항면과 함안면이 다를 것이다.

함안천의 상류나 중류의 하천변에는 자갈하상과 모래하상에서는 멱을 감을 수 있었고, 물이 깨끗하였으므로 물고기들이 많았다. 작은 웅덩이에서는 독풀을 풀어서 물고기를 기절시켜 고기를 잡기도 했고, 어른들은 낚시나 그물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았다. 전국적으로 다그러했던 것으로 아는데 잡은 고기를 그 자리에서 회를 쳐 먹기고 했는데, 어른들은 디스토마에 걸리는 경우도 많았고, 목숨도 더러 잃기고 했다고 한다. 뒤에 부산 유학가면서 구포에서 거대한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 거리에 보면 디스토마를 막기 위해 민물고기를 먹지말자는 간판이 붙어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 다양한 친목모임들이, 어른들의 모임에 아이들도 따라가기도 했는데, 하천변과 제방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함안에서는 제방을 둘이라고 했다. 둑을 부드럽게 불렀던 것 같다.

남쪽의 산지는 여항산(743.5m)을 중심으로 동서로 달리면서 남해안에 면한 진주의 반성, 마산(당시 창원)의 진북, 진동 등과 경계를 이루었다. 이 산지는 백두대간식으로는 낙남산맥(낙동강 남쪽의 산지)으로 상당히 높았다. 여항면의 여항산(각테미산으로도 불렀던 것 같다)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생동물도 많았던 것 같다. 실재로 그러했다. 군사작전을 하는 군인 트럭들이 여항산 쪽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항산의 심산유곡은 함안 산지의 보고였다. 이 산지를 통하여 마산 진동의 바닷가에서 잡힌 해산물들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것은 싱싱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함안에는 저습지가 많고, 배수로, 배수장, 유수지 등 배수시설이 많다. 그래도 남강이 잘 범람하므로 매우 많은 제방을 지니고 있다. 어릴 때 보더라도 참으로 제방이 길게 잘 발달하고 있었다. 이 제방에서 소를 먹이고, 운동도 하고, 청춘남녀가 거닐기도 하고, 하물며 제방으로 소풍도 갔다. 집중호우가 오면 제방이 터질까봐 걱정이 많았고, 더러 제방이 터지곤 하여 농경지가 물바다가 된 적도 있다. 지금도 늦은 밤에 까지 비가 와서 만일 제방이 터지면 경찰서의 오포(낮과 밤의 12시 싸이렌으로 거의 면소지 전체에 다 들린다)가 울릴 것이고 그러면 가까운 야산(동산)으로 피난가도록 하는 조치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비가 많이 오면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도 집이 먼 학생들에게는 빨리 집에 가도록 조치를 했다. 다리가 물이 잠기기 때문이었다. 함안은 물의 고장이다. 물에 잠기지 않는 풍화가 잘 된 작은 구릉지 변에 집들이 들어섰다. 작은 동산으로 고래산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소풍을 간 곳은 말하자면 함안의 상징적인 지리와 역사를 지닌 장소들이었다. 함안의 향교, 가야의 그 긴 제방, 아름다운 저수지가 있었던 악양루 등 기억에 떠 오르는 곳들만 해도 함안의 상징이 되는 곳 들이다. 당시의 소풍은 그냥 걷는 것이다. 배낭에는 전국이 그러했듯이 김밥과 사이다 음료수와 약간의 과자 등이 들어 있었고, 통상 보물찾기와 씨름대회가 열렸다.

저습지 지형이 많으니, 쌀농사 외에 연근(연뿌리), 미나리 농사도 많았다. 마름이라하여 물에서 건져 올려 삶으면 밤같은 맛이 나는 물 속의 열매도 있었다. 화문석하면 강화도를 생각하지만 과거 함안에서도 화문석을 만들었다. 골, 큰 것은 왕골이라 하여 삼각형의 줄기를 가지는 습지형 줄기 식물로서 껍질을 벗겨서 흰 속살를 말려서 방석 등 다양한 화문석을 만들었다. 강가의 모래 땅에는 땅콩도 했다. 지금 보면 소규모이지만 참으로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하였다.

함안천을 비롯한 하천들이 남쪽 지방이지만 얼음이 얼어서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곤 했다. 스케이트 만드는 법은 신발 크기의 둥근 나무토막을 길게 토막을 내고, 둥근 부분에는 곧은 굵은 철사를 붙이고 앞 뒤로 휘게 말아서 나무에 박히도록 하고, 옆구리에는 작은 못을 촘촘히 박고, 그 위로 신발을 얹고 고무줄로 동여매면 된다. 보통 한 발에만 신었다. 한 발은 그냥 들린 채로 달린다. 남은 발은 뒤로 차면서 스케이트를 밀었다. 그리고 여름에 멱도 감았다. 지금은 물도 줄어들고 잘 얼지 않고 물도 그리 깨끗하지 않아 예 같지 못할 것이다.

남강유역의 범람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본류인 낙동강이 범람하면 지류인 남강 물이 빠져나갈 곳이 없고, 따라서 남강유역에 있는 진양, 함안, 의령의 범람원이 물바다가 되고, 낙동강변의 창녕, 창원, 밀양도 물바다가 된다. 근래에 들어 남강댐이 범람하게 되면 인공수로인 가화천을 통해서 남해의 사천만으로 직접 물을 뺀다. 상대적으로 함안을 비롯한 남강 유역 들이 안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화천으로 물을 빼면서 사천만에서는 때때로 바닷물의 염도가 낮아서 어업에 지장이 있다고 한다. 저습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진흙(찰흙)이 만이 난다. 잿빛을 띤 고은 점토들로서 이것은 미술시간 공작 숙제가 된다. 사람모양과 함께 많은 조각품을 만들었다. 철사로 사람 모양(예를 들면 야구선수)으로 만들고 찰흙을 물에 개어 붙이고 그늘에 말린다. 그리고 색깔을 칠하여 작품을 완성하여 교실 뒤쪽에 전시회도 한다.

산지 구릉에는 뽕나무도 많아서 그 열매인 오디(함안에서는 오들개라고 했던 것 같다)가 많았다. 봄이면 찬꽃(참꽃, 진달래)을 따기도 하고 칡을 캐기도 한다. 오디와 칡은 등굣길 교문앞에서도 팔고 시장에서도 팔았다. 집집마다에는 거의 감나무가 최소 한 그루씩은 있을 정도로 감농사도 많았다. 감꽃으로 줄을 엮기도 한다. 작은 감이 열리는 나무를 고욤이라고 하는데 함안에서는 기암이라고 한다. 감떡을 만들어 시장에 나오기도 한다. 파수 곶감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읍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마을에는 마을 뒤쪽에 혹은 집 뒤에 대나무 밭이 많았다. 대나무로 만든 공예품들이 시장에 많이 나왔다. 대나무를 얻어서 연을 만들기도 하고, 빨랫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용작물도 여러 가지로 했다. 담배농사도 지었고, 박하농사도 지었다. 박하밭을 지날 때의 진한 박하 냄새는 잊지 못한다. 물론 고구마, 감자, 참외, 수박, 딸기 농사도 성했다. 참으로 많은 종류의 농작물이 재배되었다. 그리고 누에고치도 많이 쳤다. 재사공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번데기 먹은 기억은 없다. 번데기는 부산에서 처음 먹었던 것 같다. 자연산 산딸기도 시장에 많이 나왔다. 생강, 마늘, 그리고 모든 야채들, 약재로서 택사 재배도 기억이 난다.

함안은 남쪽이라 이모작이 가능했다. 겨울과 봄에는 보리농사가 성했다. 영남의 보리는 겉보리라 하여 껍질이 매우 단단한 보리로서 매우 껄끄러운 보리밥으로 만들어졌다. 호남지방의 보리는 쌀보리라하여 껍질이 덜 단단하고 보리의 맛도 좋았던 것 같다. 지금은 청보리 밭(푸르게 싹이 튼 보리밭)이 아름답게 보이고, 보리농사가 적어서 보리밥집이라는 웰빙 음식점도 많지만 그때는 쌀밥을 거의 못먹고 보리밥을 먹었다. 그나마 보리밥도 건너 띄는 사람들도 있었다. 겨울이 되면 서릿발이 끼이지 않도록 학생들이 단체로 보리밟기에 동원되었다. 일렬로 기차놀이 하듯이 밟고 나갔다. 보리를 수확하고 나서 바로 물대고 모내기를 한다. 못줄을 잡아주던 기억은 있다. 보리밥이 너무 잦아 질린다싶으면 보리 대신에 콩나물, 무, 고구마, 감자 등을 혼합하기도 한다. 명절과 생일 외에는 쌀밥은 거의 먹기 힘들었다. 그나마 먹어야 할 때 먹을 수 있었다면 그것도 행복한 편이었다. 거의 모두가 그러하게 살았으므로 별다른 문제없이 살아갔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학생들은 빈 논으로 동원되어 떨어진 나락 이삭을 주워 학교로 가져갔다. 학교에서는 이를 모아 쌀로 만들어 학교에 필요한 비품을 샀다. 실제로 논농사가 적은 사람들이 추수가 끝이 난 논으로 이삭을 주으려 다녔다. 부농의 논은 이삭으로 열린 공간이었다. 가장 생각나는 것은 각 교실에 일방적으로 전달이 되는 스피커를 다는 것이었다. 봄이면 긴 대젓가락을 만들어 송충이 잡이도 나갔다. 이 일은 부산에서 중학 다닐 때도 계속되었다. 가끔 밀농사도 지었다. 아마도 누룩 때문인지 모르겠다. 밀서리를 하여 구워 먹던 일이 많았다. 봄이면 지금도 그러하듯이 여자들은 쑥 캐러 참으로 많이 다녔다. 쑥은 주로 떡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모든 먹거리는 우선적으로 끼니용으로 들어갔다.

가야는 작은 면단위 고장이지만 그래도 도심지였다. 생각해보면 동기생들의 집들 중에서 정미소, 제재소, 술도가(막걸리), 연탄공장, 화물차주, 목욕탕, 전매서, 공무원 등의 집 친구들이 비교적 부유했다. 농업에서는 일부 상대적인 부농과 축산 농가들이 그러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가야 시내만이라도 아스팔트가 깔리고, 최초로 3층 건물이 들어섰다. 어린 우리들은 신기해서 구경을 가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는 일제시대 적산 가옥들도 많았다. 도로변 상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적산 가옥들은 고급에 속하는 주택이었다. 필자의 집은 초가집이었고, 함안을 떠나기 전까지 초가집이었다. 초가집은 볏짚을 직접 이용하므로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집이다. 볏집을 높이 쌓아서 초가도 입히고, 겨울에 땔감도 하고 소죽도 끎이고 했다. 높이 쌓은 볏집단은 어린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초가를 해마다 새로 이면 좋은 데 그러질 못한 경우에 몇 년이 지나면 노린재와 같은 냄새나는 벌레가 생기고,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은 간장 색을 보이기도 한다.

당시는 오일장이 철저했다. 함안의 여러 면들, 군북, 함안, 법수, 칠원 등을 다니면서 오일장이 열렸다. 오일장은 대단했다. 곡물, 소시장, 어물, 의류상, 철물 등 분야별로 나누어져서 장날이 섰다. 장날에는 대체로 장날 구경을 했다. 이웃집에 오일장에서 포목을 하시던 분이 계셨는데, 밤 늦게 장을 마치고 다음 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여러 상인들이 함께 빌리는 화물차에 짐을 다시 실어 올리는 모습이 기억이 난다. 물론 군청 소재지였으므로 상설로 하는 집들도 시장 인접하여 있었지만, 역시 장날이 되어야 가야면, 혹은 인접한 면의 사람들이 장터에 모였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므로 장작을 시장에서 산다. 그러나 장작이 비싸므로 보다 값싼 갈비(소나무 잎) 뭉치를 사서 불을 때었다. 윗목과 아랫목이 확실히 구분되던 시절이었다.

함안의 위치는 경남과 부산, 울산을 다 포함해서 보면 동서남북상으로 거의 중앙에 위치한다. 보다 큰 도시에서 물건을 사올 일이 있을 때는 함안은 주로 마산을 이용했다. 마산은 당시에도 진주를 서서히 능가하고 있었다. 또한 부산에 가까우므로 함안은 마산의 배후지 역할을 했다. 당시 중학교 입시가 있을 때였으므로, 초등학교에서의 입시열은 대단했었다. 함안 외에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마산으로 가장 많이 나갔다. 그리고 부산으로 갔고, 진주쪽으로는 거의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마산으로 통학하는 중학과 고교 학생들로 함안 역전은 붐볐다. 기차가 연착하여 학교에 늦는 경우에는 지각을 면제해주었다고 한다. 부산은 할 수 없이 유학생활을 해야 했다. 진주는 상대적으로 낯선 곳이었다. 당시 서부 경남의 중심이 진주였고, 북부나 북서부 경남은 오히려 대구쪽으로도 진출했다. 그 때만해도 대구는 내륙의 교육도시로서 명성이 있었다. 당시 마산은 신마산, 구마산, 북마산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아직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마산중학을 다니면서 통학을 했던, 이제는 이 세상에 안 계시는, 형이 부러웠다. 형은 기차를 타고 다녔으므로. 기차와 버스를 별로 탈 일이 없었던 유년 시절이었다.

당시 농사를 하지 않는 집이라 하더라도 소규모로 축산도 했다. 필자의 집에서도 한 목에 다 하지는 않았지만 돼지를 치기도 했고, 닭도 키웠고, 때로는 토끼도 키웠다. 어떤 집은 거위도 키웠다. 거위는 집도 지키는 역할도 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집에서 개도 키웠다. 지금 보면 음식이 별로 남지도 않았지만, 음식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시골로 가면 대규모로 양계장을 하는 집도 있었는데, 그 집의 아이는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과 닭고기를 자주 가지고 와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생의 눈으로 보더라도 이 정도의 경작과 축산의 품목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보다 더 많은 작물이 있었을 것이고 매우 다양한 농업이었던 같다.

함안은 따뜻한 지역이었으므로 탱자나무도 많았다. 학교 울타리가 거의 모두 탱자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래로는 개구멍이 나 있어 그 쪽으로 놀이삼아 다니기도 했다. 겨울철 난로 땔감으로 탱자나무의 마른 가지 부스러기도 모아 사용했다. 학교 교정에는 은행나무, 오동나무가 있었고, 그 때만 해도 낡았지만 일제 시대 교실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일부 쓰러질까봐 콘크리트로 만든 버팀목을 세워두기도 했다. 교실 바닥은 나무였으므로 물청소를 하지안고 초를 칠하여 광을 내고 맨발로 다녔다. 당시 가야초등학교는 축구를 잘하는 학교였다.

(후기)

함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려서 당시의 어른들만큼 고생이랄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물자가 부족하여 늘 궁기가 끼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금방 갈 수 있지만, 그리 쉽지가 않다. 당시의 지역의 지리적 상황을 잘 살펴보면 그 변화가 우심함을 알 수가 있다. 지역지리에서 연구의 단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시군 단위가 가장 지역성이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기초지방자치단체별로 지지를 기술하는 것도 지역지리 연구의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아서 기억을 최대한 더듬어 지리의 글을 적었다. 기억은 수치적은 아니지만 특정 장면으로는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기억도 기록으로 다시 살아나고 더욱 분명해진다.

이제는 함안은 전국의 모든 곳들이 그러하듯 엄청난 지리의 변화를 겪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천의 물은 마르고, 노는 아이들도 별로 없고, 공장들이 들어서고, 비닐하우스 재배지가 들어서고,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중심지에는 큰 건물들도 들어섰다. 그래도 인구가 준다고 인구 증가책을 강구하고 있다.

기억의 지리를 말한다. 기억은 불분명한 점이 있더라도 보거나 들었던 것들을 머리에 저장한 것이다. 오랫동안 살았던 곳에서의 기억은 그래도 실체가 있고, 무엇보다도 많고, 그 내용에는 인과관계를 잘 살필 수가 있다. 이것은 지역연구, 지역지리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만일 내가 살지 않았던 지역을 기술하라고 하면, 답사를 가고, 참고문헌을 뒤지고, 인터뷰를 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사진을 정리하고 시대별 지도상의 작업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잘 아는 지역도 지역에 대한 논문을 만들고 책을 만들고자 하면 이러한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함안은 아름답고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지리적인 기억을 중심으로 함안을 들여다 본다. 함안에 대해서는 기억만으로도 이 정도를 살필 수 있는 것은 장시간의 삶 속에서 자연적으로 기억 속에 기록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리학자들은 각자에게 이러하듯이 어울리는 지역에 대한 기술을 하여 각자의 지역지리를 만들어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필자가 지역지리를 한다면, 현재 살고 있는, 가장 오래 살았던 서울 송파구가 있을 것이고, 미국에서 5년간 살았던 유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함안이 있을 것이다. 부산에서 7년을 살았고 영도구가 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정확한 관찰과 기술, 그리고 과학성과 논리성을 벗어나지 않는 아름다운 문장력을 지니면 더 좋은 것이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감히 권유한다면 각자가 아는 지역에 대한 지리적인 기록을 남겼으면 한다. 이러한 결과들이 쌓이게 되면 지역에 대한 지리적인 이론도 도출될 것이다(2007년 4월 18일 작성).

시소러스

rdfsLabel : 함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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