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정섭(車政燮, 1951년 2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52대 경상남도 함안군수이다. 2002.8 ~ 2007.8 중앙대학교 교육학과 겸임교수 2008.3 ~ 2008.6 보건복지부 아동청소년정책실 아동청소년복지정책관 2008.6 ~ 2011.6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원장 2009.8 ~ 2012.7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2011.9 ~ 2014.5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2012.8 여성가족부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 2014.7 ~ 2018.6 제52대 민선 6기 경상남도 함안군수(초선, 자유한국당)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 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장소이다. 이오는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조진래(趙辰來, 1965년 11월 20일 ~ 2019년 5월 25일)는 대한민국의 변호사이자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홍준표 경상남도지사 재임 시절 경상남도 정무부지사를 지냈으며, 2013년 8월 산하기관인 경남테크노파크 센터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조건에 맞지 않는 대상자를 채용하는 데 관여한 혐의로 2018년 7월 검찰에 송치됐다. 창원지검은 2019년 5월 10일 조진래를 소환 조사했다. 2019년 5월 25일 함안군 법수면에 위치한 형의 집 사랑채에서 숨져 있는 것을 보좌관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조려(趙旅)[1420~1489]는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455년(세조 1)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함안으로 돌아와 서산(西山) 아래 은거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서산을 백이산(伯夷山)이라 불렀다. 조려는 벼슬하지 않고 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를 어계 처사(漁溪處士)라 하였다. 단종이 유배지에서 사사당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 시신을 수렴하였다고 전한다. 유지(柳輊), 김시습(金時習)과 교유하였고,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박재인 선생(1536~1618)은 조선 전기 함안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중사(仲思), 호는 황암(篁巖)이며 1536년 지금의 군북면 명관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최영경(崔永慶), 조종도(趙宗道), 하항(河沆), 김면(金沔) 등과 교유하였다. 거처하는 집을 정묵재(靜?齋)에서 정적(靜寂)으로 바꾸고 바위 위에 대를 심은 다음 스스로 호를 황암으로 고치고 학문에 정진했으며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 이칭(李偁), 이정(李瀞)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남명의 사상을 철저히 이어받아 행한 학자로 평가받았으며 함안군수로 부임한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학문의 침중함에 감복해 은덕유조(隱德有操)라 칭할 정도였다. 또, 조식 선생도 형(兄)인 송암 박제현(松巖 朴齊賢)과 황암의 재주에 감탄하여 「함안의 고사는 난형난제다」라고 했다.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자 불교 승려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상도 김해를 거쳐 강원도 강릉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이 자행한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하였다.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손양원(孫良源)[1902~1950]은 1902년 6월 3일 함안군 칠원읍 덕산4길 39[구성리 685]에서 독립운동가 손종일(孫鍾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김은수이다. 아들은 손동인(孫東印)과 손동신(孫東信)이다.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칠원 공립 보통학교 재학 시절이던 1915년부터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다. 중동 학교(中東學校)에 재학 당시 목사로부터 1919년 3·1 운동 독립 선언식의 계획을 듣고 중동 학교 학생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였다는 명목으로 퇴학을 당하였다. 1935년 평양 신학교(平壤神學校)에 진학하였다.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일제 탄압에 굴복하여 평안북도 노회(老會)가 신사 참배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9월 10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에서도 신사 참배를 가결하였다. 이에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손양원도 신사 참배를 반대하며 ‘성경에 우상 숭배는 금기 사항이고 우리 조선 사람이 일본의 개국신(開國神)과 일본 왕에게 참배할 이유가 없다’는 설교와 강연을 하였다. 1939년 7월 전라남도 여수의 나병 환자 요양소인 애양원(愛養院) 교회의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손연준이라는 이름도 손양원으로 고쳤고, 그의 부인도 양순(良順)으로 개명하였다. 신사 참배의 거부와 일제 패망을 발언함으로써 1940년 9월 25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41년 11월 4일 광주 지방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하여 옥고를 치렀다. 광복으로 석방되고 194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사건에서 두 아들이 총살당하였으며, 6·25 전쟁에서는 손양원도 공산군에 체포되어 순교하는 비운을 맞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방(趙垹)[1557~1638]이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조방의 자는 극정(克精), 호는 두암(斗巖)·반구정(伴鷗亭)이다. 조방은 함안 출생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현손이며, 이황(李滉)의 『성학 십도(聖學十圖)』를 연구하였고 도학(道學)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창의하여 정암진(鼎巖津)과 기강(岐江) 등을 지키는 등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 산성(火旺山城)의진(義陣)에서 군무를 도와 많은 적을 무찔러 고을 사림들이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조정에 상소하여 포창(褒彰)을 청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근제(趙根濟, 1953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민선 7·8기 경상남도 함안군수이다. 1997.08~2005.08: 제13·14대 함안축산업협동조합 조합장 2000~2007: 창원지방법원 함안군법원 조정위원 2006.07~2010.06: 제8대 경상남도의회 의원(초선, 함안군 제1선거구) 2008.07~2009.11: 제8대 경상남도의회 후반기 농수산위원회 부위원장 2009.11~2010.06: 제8대 경상남도의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2010.07~2014.03: 제9대 경상남도의회 의원(재선, 함안군 제1선거구) 2010.07~2012.06: 제9대 경상남도의회 전반기 농해양수산위원회 위원장 2012.07~2014.03: 제9대 경상남도의회 후반기 부의장 자유한국당 중앙직능위원회 농림축산분과 부위원장 2018.07~2022.06: 제53대 경상남도 함안군수(초선, 민선 7기) 2022.07~: 제54대 경상남도 함안군수(재선, 민선 8기) 2022.09~: 대한민국 시장·군수·구청장 협의회 군수대표

19세 때 고향인 검암리로 돌아와 곤지재(困知齋)를 짓고 시냇가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은 후 간송(澗松)이라고 자호하였다. 중국 송대 범질(范質)이 “동산의 화려한 꽃은 일찍 피었다가 먼저 시들고,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울창한 모습으로 늦게까지 푸름을 머금고 있네."라고 표현한 시구에 근거해 호를 삼았다. 20세 때인 1604년(선조 37)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조임도는 관직에 나아가는 것보다 진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탐구하길 원했으므로 32세에 과거 시험을 그만두고 오로지 독서에 전념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883년 11월 21일 경상도 함안도호부 평관면 평광리(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평광마을)에서 아버지 이질(李瓆, 1861 ~ ?. 2. 8)과 어머니 경주 박씨(慶州 朴氏) 박평암(朴平岩, 1860 ~ ?. 3. 21)[6]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안창호 선생과 친분을 쌓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14년 몽골에 가서 의료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몽골 마지막 칸 복드 칸의 주치의였다고 하며,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을 세워 의료활동을 병행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몽골인의 70%가 걸렸다던 성병 치료에 탁월했다고 한다. 그리고 1919년 당시 몽골 최고 훈장이었던 '에르데니인 오치르(ᠡᠷᠳᠡᠨᠢ ᠶᠢᠨ ᠸᠴᠢᠷ/Эрдэнийн Очир)'를 받았다고 한다. 동시에 개신교 선교 활동과 의열단에 가입하고[7]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 등의 독립운동 중[8] 당시 몽골의 지배자였던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사병들에게 붙잡혔고, 1921년 2월 2일 결국 피살됐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2000년에 몽골 울란바토르에 기념비를, 2001년에는 기념 공원이 몽골 정부와 연세대 의료원, 연세대 총동문회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2017년 9월 29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그와 그의 부인 김은식을 기리는 부부위패가 봉안되었다.

2012년 5월 ~ 2015년 11월: 제19대 국회의원 (경남 의령군함안군합천군/새누리당) 건설교통부 행정담당관 1990년: 국토해양부 도시교통운영과 과장 1999년: 건설교통부 부산항공청장 2002년: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부이사장 2004년: 한국철도시설공단 상임고문 전국화물자동차공제조합 이사장 한국철도협회 회장 2008년 8월 ~ 2011년 8월: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 2012년 5월 ~ 2015년 11월: 제19대 국회의원 (경남 의령군함안군합천군/새누리당) 2012년 5월: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위원 2012년 7월: 제19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 2013년 7월: 새누리당 경상남도당 위원장 2013년 4월: 제19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 2014년 6월 ~ 2015년 11월: 제19대 국회 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대부분을 거절하였으며 아울러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조식(曺植)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국난을 당하자 가정 먼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인물이 있다. 더욱이 초야에서 학문을 하다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롭자 분연히 일어나 구국의 길을 택했다. 함안 출신 박진영 장군이다. 박진영(朴震英, 1569~1641) 장군은 자(字)는 실재(實哉), 호(號)는 광서(匡西), 시호는 무숙(武肅)으로 선조 2년 11월 19일에 함안군 검암촌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식견이 남달랐고 기개 또한 대단하였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의 학문과 덕행이 두드러졌다. 임진왜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다 박진영 장군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무찌르는 등 큰 공훈을 세웠다.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쳐들어와 4월 15일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의병 100여 명을 모아 군수 류숭인과 함께 김해로 갔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라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철수한 장군은 대현 고개를 넘어오는 적을 막고 칠원에서 적을 격퇴하기도 했다.

처녀뱃사공(윤부길 작사/한복남 작곡/황정자 노래)1953년 작. 6.25전쟁이 끝난 1953년 9월 함안군의 가야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부길부길쑈라는 유랑극단을 이끄는 단장인 윤부길이 강을 건너려고 나룻배에 몸을 실었는데 나룻배의 뱃사공이 20대의 처자였다. 윤부길은 왜 그 처녀가 뱃사공을 하나 그 이유를 물어보니 1950년에 군에 입대한 오빠 〈박기준(한국전쟁 중 전사)〉한테 소식이 없어 오빠를 대신하여 두 여동생 〈박말순〉과 ,〈박정숙〉이라는 두 처녀가, 교대로 나룻배를 저어 길손들을 건네준다는 애절한 사연을 듣고 〈낙동강 강바람이 치맛폭을...〉으로 시작하는 노랫말을 갈무리하여 그당시 싱어송 라이터였던 한복남에게 자기가 쓴 노랫말에 곡을 붙여달라 의뢰하고 한복남으로부터 《오동동 타령》을 받아 인기 가수가 된 황정자가 불러서 알려진 노래가 《처녀 뱃사공》이다.

조경규는 1876년 6월 1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소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0일 군북 잘날에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5천 명의 시위대와 함께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조준사격을 가했고, 그는 총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조경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