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line
1868-01-01 (1)
1919-03-09 (1)
1919-03-18 (1)
1919-03-19 (1)
1919-03-20 (1)
1948-10-19 (1)
1950-06-25 (1)
1950-07-01 (1)
1960-04-15 (1)
장소
가야시장 (1)
조경규 사무소 (1)
인물
박상엽(1855~1919) (1)
박진영(1569~1641) (1)
손양원(1902~1950) (2)
조경규(1876~1919) (1)
조경규(1904~1983) (1)
조현택 (1)
황상기 (1)

사건

(12)
함안_3·1_독립_만세_운동_대산면_평림리_만세_운동

1919년 3월 9일 함안의 칠북면 이령리 시위를 비롯해 함안면 읍내 시위, 군북면 시위, 칠원면 시위 등 함안의 각 지역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점차 강화되면서 발생하였다. 종족 마을이 발달된 함안 지역의 특성, 즉 공동체적 유대가 3·1 운동이 강력하고 공세적인 시위운동이 되도록 하였으며, 유림(儒林)과 구 유지층이 주로 시위를 주도하였다. 먼저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서 연개 장터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김세민 등은 3월 6일 29명의 동리 인사들의 준비 모임을 통해 3월 9일 연개 장날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대회장인 김세민이 개회사를 하고, 이어 유관도가 격려 연설을 한 후, 김정오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경명 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손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석양이 질 때까지 동리를 행진하였다. 1919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그 이튿날인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등이 연쇄적으로 발발하였고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이 열렸다. 1919년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이 발생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함안 3·1 독립 만세 운동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서 연개 장터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김세민 등은 3월 6일 29명의 동리 인사들의 준비 모임을 통해 3월 9일 연개 장날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대회장인 김세민이 개회사를 하고, 이어 유관도가 격려 연설을 한 후, 김정오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경명 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손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석양이 질 때까지 동리를 행진하였다. 1919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그 이튿날인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등이 연쇄적으로 발발하였고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이 열렸다. 1919년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이 발생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성·함안군에서 학생들의 반혁명세력 규탄시위

고성군 고성읍에 있는 최석림의 선거사무소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최 씨의 운동원 김도현·안만두를 선거사무소로 끌고 와 가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학생들은 두 사람에게 최 씨와 운동원들의 소재를 묻고 수색전을 전개하는 동시에 읍내에 세워진 최 씨의 입간판과 벽보 등을 철거하였다. 이날 함안지역에서는 입후보자 조경규 지지파와 반대파 학생들이 대치하는 일이 있었고, 밤 8시 30분경에는 마산 3.15혁명동지회 학생 80여명이 가야면 말산리에 위치한 조경규의 선거사무소 유리창·옆집 유리·전화기·가재도구 등을 부수었다 『동아일보』 1960. 7. 26 석3면 ; 7. 27 조3면

여수·순천 사건

여수순천반란사건,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부르는 여순사건은 제주4·3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 지역을 점령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 국가를 구축하였다. 사건 발생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여순반란사건 또는 전남반란사건이라고 불렀으나 1995년부터 국사 교과서에 ‘여수·순천10·19사건’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일반적으로는 여순사건이라 부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함안지구전투

8월부터 약 한 달 반 동안 함안의 남서쪽에 위치한 여항산과 서북산을 사이에 두고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여항산과 서북산은 바로 마산에 인접한 지점으로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마산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고, 부산을 향하는 교두보를 내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두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바뀌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함안의 군민(軍民)은 격전을 치르며 낙동강 방어선의 종단지점을 사수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함안지구전투에서 피아간 엄청난 포격과 폭격으로 인하여 산과 들이 황폐해졌으며 많은 가옥들이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고 특히 수많은 함안 주민들이 사망하였다.

함안 3·1 독립 만세 운동 함안읍 만세 운동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서 연개 장터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김세민 등은 3월 6일 29명의 동리 인사들의 준비 모임을 통해 3월 9일 연개 장날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대회장인 김세민이 개회사를 하고, 이어 유관도가 격려 연설을 한 후, 김정오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경명 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손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석양이 질 때까지 동리를 행진하였다. 1919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그 이튿날인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등이 연쇄적으로 발발하였고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이 열렸다. 1919년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이 발생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민주당 함안군당부 간부 10여 명 시위

15일 낮 12시 경『마산일보』1960. 4. 16 2면, 1960. 4.17 2면 ;『조선일보』1960. 4. 15 조3면.서울신문은 12시 30분 경으로(『서울신문』1960. 4. 16 조3면), 반면 동아일보는 오후 1시 경 으로 기록하고 있다(『동아일보』1960. 4. 16 조3면).민주당 함안군당부 간부 10여 명이 시위를 감행했다. 민주당간부들은 “민주주의만세”, “3·15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3·15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자”, “마산사건 자유당이 책임지라”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에는 장날이라 모인 수많은 군중들이 호응을 보냈으며, 군중들은 “불법선거 다시 하자”, “마산사건은 정부가 책임지라”등의 구호를 함께 외치며 시위대를 뒤따르기도 했다. 시위는 경찰관 약 50명에게 포위된 가운데 가야시장 입구를 출발하여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이날 시위로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없었다.『마산일보』1960. 4. 16 2면, 1960. 4.17 2면 ; 『서울신문』1960. 4. 16 조3면; 『조선일보』1960. 4. 15 조3면 ; 『동아일보』1960. 4. 16 조3면 ; 3·15의거사편찬위원회, 401쪽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다.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저항으로 이겨내고 각성과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민족의 운명을 새로 개척해나간 계기가 된 전쟁이다. 명의 원조도 있었지만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거족적인 저항으로,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과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동은 불리했던 전쟁 국면을 전환시킨 결정적인 힘이었다.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명과 청이 교체되면서 병자호란이라는 시련을 예고하기도 했다.

칠원민란

1868년(고종 5) 경상도 칠원현(지금의 함안군)에서 일어난 민란. 현감 조현택(趙顯宅)의 탐학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주동자인 황상기(黃上基)·이도여(李道汝)·전홍이(全弘伊) 등은 통문을 돌려 민중을 규합하여 객사(客舍)에서 단체로 모여 곡(哭)을 하고 현감을 축출하였으며, 감옥을 파괴하였다. 그런데 황상기 등 민란의 주모자는 난을 일으키기 전 여러 차례에 걸쳐 감영에 호소하였으며, 여기에는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하리(下吏) 3명도 가담하였다. 주모자의 한 사람인 이도여는 몇년 전 민란의 누망죄인(漏網罪人 : 수사망에서 바진 죄인)이었다고 하는데, 그 민란이 어떤 민란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정부에서는 행부호군(行副護軍) 조창영(趙昌永)을 칠원현감 겸 안핵사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결국 황상기·이도여·전홍이 등은 효수되고, 그 밖에도 다수의 민란 참여자가 유배 등의 형을 받았다. 그리고 민란을 야기시킨 현감 조현택은 경상감사로부터 파면되었다가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강진현(康津縣)으로 유배되었다. 이 민란에 무근동과 구산면에서는 한 사람도 가담하지 않았는데, 무근동은 주세붕(周世鵬)의 후예가 많이 사는 곳이었다. 이로 인하여 무근동의 주희상(周熙商)은 관리에 임용되었다.

군북 독립만세시워

1919년 3월 20일 군북 장날에 발발한 독립만세시위

6.25 전쟁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한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하 발발한 전쟁이다. 교전이 이어진 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사실상 3년 1개월(1,129일)간이며, 현재까지 명목상으로는 73년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역이용해, 극동아시아의 미소 냉전 사이에서 승기를 잡으려 한 의도가 있어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하는데 때문에 6·25 전쟁은 전후 냉전의 시작을 대표하는 사건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함안도 낙동강방어선의 한 축으로써 많은 희생을 겪기도 했다

함안 민간인 희생 사건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 함안경찰과 국군, 그리고 CIC는 함안 국민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함안경찰서와 지서로 소집·연행하여 함안면 북촌리 성고개, 대산면 대산지서 인근 야산, 산인면 문암초등학교 뒷산, 마산 앞마다 등에서 집단희생 - 함안군 민간인 56명이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 등으로 집단희생된 사실 진실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