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간(木簡)이란 종이 대신 나무를 반듯하게 다듬은 면에 먹글씨를 쓴 기록 유산으로서, 당대 사람들이 직접 쓴 서사 자료로 당시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중국에서는 얇은 대나무에 묵서한 것을 죽간(竹簡), 나무에 묵서한 것을 목독(木牘)이라 하는데, 한국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죽간은 발견된 적이 없어서 나무에 글을 쓴 것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통틀어 목간이라고 부른다.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는 종이보다 효과적인 소재인 나무로 제작되어 주로 행정 기록이나 장부를 비롯한 관청 간 왕래 문서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휴대가 용이한 장점이 있어 간이 필기장, 물품 이동 시 꼬리표 등으로 활용되었다. 함안 성산산성(咸安城山山城)[사적 제67호]에서 출토된 목간의 제작 시기는 신라의 관등(官等) 성명이 등장하고, 신라 인명 표기법, 함안 성산산성의 축조 기법 등을 통해 볼 때 6세기경으로 판단된다. 함안 성산산성은 국립 가야 문화재 연구소에서 1992~2015년까지 연차적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지금까지 국내 목간 출토량의 절반에 가까운 309점이 출토되었다.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咸安城山山城出土木簡) 중 묵서가 남아 있는 목간은 모두 250점으로, 그중 양쪽 면에 묵서가 되어 있는 목간은 83점, 한쪽 면에만 묵서가 있는 것이 165점이다. 사면에 모두 묵서가 있는 목간도 2점이 있다. 국립 김해 박물관과 국립 가야 문화재 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함안 말이산 고분군(咸安末伊山古墳群)의 도항리 39호분에서 출토된 아라가야의 등잔형 토기 2본으로, 1993년 4월부터 그해 8월까지 국립 창원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발굴되었다. 등잔형 토기는 마형 토기, 압형 토기, 가형 토기 등과 더불어 영남 지역 삼국 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이형 토기(異形土器) 중 하나이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 25호분과 신라금령총(金鈴塚) 등에서 유사한 기종이 출토된 바 있다. 1본은 현재 함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다른 1본은 국립 김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반구정(伴鷗亭)은 조선 중기 학자 조방(趙垹)[1557~1638]이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조방의 자는 극정(克精), 호는 두암(斗巖)·반구정(伴鷗亭)이다. 조방은 함안 출생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현손이며, 이황(李滉)의 『성학 십도(聖學十圖)』를 연구하였고 도학(道學)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창의하여 정암진(鼎巖津)과 기강(岐江) 등을 지키는 등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 산성(火旺山城)의진(義陣)에서 군무를 도와 많은 적을 무찔러 고을 사림들이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조정에 상소하여 포창(褒彰)을 청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낙동강 우포(藕浦)의 말 바위[斗巖] 위에 반구정을 짓고 마주 바라보이는 곽재우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오가며 산수의 자연과 함께 은둔생활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에 있는 조선시대 고려 유민들의 마을. 시도기념물. 이 곳은 고려 말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이오(李午)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 절의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백일홍이 만발한 이 곳을 택해 거처를 정한 뒤 그 후손들이 살아온 장소이다. 고려가 망하자 선생은 여러 현인들과 송도의 두문동에서 망복수의(罔僕守義)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거처를 찾던 중, 산간벽지에 띠만이 우거진 숲 속에서 백일홍이 만발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마을의 터전을 일궜다. 그 자리는 오늘날 자미단(紫微壇)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함안 악양루는 남강이 흐르는 넓은 들판이 한눈에 보이는 절벽 위에 세운 정자 건물로 중국 명승지 ‘악양’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기두헌(倚斗軒)이라 쓰인 현판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청남(菁南)오재봉(吳齋峯)이 쓴 함안 악양루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함안 악양루를 오르는 길에는 좁은 석문이 있으며, 석문을 지나 보이는 나무 데크와 난간은 최근에 설치되었다. 함안 악양루에 오르면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편 함안 악양루로 가는 길 한쪽에 ‘처녀 뱃사공 노래비’가 있다. 1992년 10월 2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함안 군청에서 소유하여 관리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삼(趙參)선생이 후진양성과 남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은 정자로서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無盡亭)이라 명명하였다.(1542년) 무진선생은 1473년(성종 4년)에 태어나 성종 20년(1489)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였다. 함양 · 창원 · 대구 · 성주 · 상주의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 앞면 3칸 · 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이다.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건물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세붕 선생의 기문에 “천명을 알고 용퇴할 수 있었기에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 정자의 경치와 선생의 즐거움이 무진할 것이다.”는 구절에 있어서 청풍명월과 함께하는 즐거움이 끝없음을 이름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며,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주물주의 무진정이라 하겠다”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가 이어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말이산고분군과 함께 웨딩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수레바퀴 모양 토기는 높이 15.2㎝의 크기로, 굽다리 위에 뿔을 형상화한 'U' 자 모양의 원통형 용기를 올려놓고 그 양쪽에 수레바퀴 한 쌍을 배치한 형태이다. 바퀴는 원형판의 가장자리에 선을 그어 나타내었으며, 그 내부에 직사각형 구멍을 뚫어 바큇살을 표현하였다. 또한, 바퀴의 중앙에 구멍을 뚫고 굴대와 연결함으로써 수레바퀴가 실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말이산 4호분 출토 수레바퀴 모양 토기는 아라가야의 뛰어난 토기 제작 기술과 미적 감각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함안 말이산 고분군(咸安末伊山古墳群)의 도항리 39호분에서 출토된 아라가야의 등잔형 토기 2본으로, 1993년 4월부터 그해 8월까지 국립 창원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발굴되었다. 등잔형 토기는 마형 토기, 압형 토기, 가형 토기 등과 더불어 영남 지역 삼국 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이형 토기(異形土器) 중 하나이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 25호분과 신라금령총(金鈴塚) 등에서 유사한 기종이 출토된 바 있다. 1본은 현재 함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다른 1본은 국립 김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불꽃무늬 굽구멍 토기[화염문 투창 토기]란 5세기 대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한 함안 양식 토기의 한 종류이며, 화염형 굽구멍 토기라고도 불린다. 가야 토기 중 가장 독특한 굽구멍 형태를 지니고 있는 불꽃무늬 토기는 주로 4세기 후반에 처음 출연하여 6세기 전반까지 아라가야와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하였으며, 불꽃무늬의 형태에 따라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불꽃무늬 토기의 출현 배경으로는 고구려 불교 영향설, 죽은 사람을 내세로 인도하거나 악령과 재앙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의미를 지닌 제사, 의례 용기인 의기설(儀器說), 조명용 토기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